[바둑아, 나하고 놀자] 詩로 만나는 '패착'
박정원 기자
승인
2022.07.16 11:02 | 최종 수정 2022.07.19 21:21
의견
0
< 패착 > 박목월
그 치를 만나
젖혀 이을 수도 있는 일을
한 자욱 물러서서
호구를 쳤다.
따지고 보면 그것이 패착.
각생(各生)하자는 것이 어수룩한 수작.
밀고 나가야 했다.
그러고도 기회는 있었다.
그 치를 만나
건곤일척, '패'라도 쓸 수 있었다.
하지만 삶은 투쟁이 아니다.
순리로 질 수도 있다.
이미 그르친 일을.
귀를 살리자니, 중앙이 흔들리고
돌을 쥔 손에 땀이 배는데
마음을 모아
조용히 한 점.
천심(天心)에 두고.
박영준씨의 위로를 받으며
교문을 나왔다.
지난번에 알아본 바둑용어 '패착'에 대한 시가 있어 올려봅니다.
평소 바둑 두기를 좋아했던 박목월 시인이 소설가 박영준 교수를 만나러 연세대학교에 가서 바둑을 둔 일을 시로 쓴 것입니다. 담백하게 써내려간 시는 두 중년 남자의 대국 모습을 눈으로 보듯이 읽혀집니다.
두 작가가 함께 나온 위 사진은 <문화예술> 2002년 6월호에 극작가 차범석씨가 '아, 인생무상'이란 글에 올린 것인데, 1971년 1월에 '현대문학상' 심사를 마치고 찍은 사진이라고 하네요.
바둑 두러 갔다가 패착으로 궁지에 몰려 여러 방도를 다 써도 판은 이미 돌이킬 수 없게 되고, 결국 위로를 받고 시무룩하게 뒤돌아 나왔을지도 모르겠지만 왠지 이 또한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.
시인은 "나는 바둑을 두기보다는 향락하는 편이요, 또한 사활(死活)이 무상한 수를 생각하는 그것 자체가 즐거운 것이다. 그러므로 내 바둑은 장고형(長考型)으로, 대체로 나의 상대가 지는 것은 수 부족보다는 인내가 약하기 때문이다."라고 말하기도 한 걸 보면 아마도 바둑을 몹시 사랑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.
저작권자 ⓒ 바둑경제,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